<전남일보, 김영집의 고전담론> 지치(至治)를 추구한 개혁사상가 조광조
벽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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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18:09
"바른 정치 실현하고자, 옳은 실천만 했을뿐"
지치(至治)를 추구한 개혁사상가 조광조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호는 정암(靜菴). 조선중기의 도학자 개혁사상가. 저서 '정암집'.
입력시간 : 2017. 07.28. 00:00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위치한 조광조 유배지. 1519년 (중종 14년) 기묘사화를 당해 이곳으로 유배되었으며 그해 12월 20일에 사약을 받았다. 화순군 제공
벽초 정암 선생님께서는 1519년 화순 능주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는데요. 결국 찌질한 임금 중종의 배신에 화나지 않으신지요?
정암 내 나이 서른여덟이었네. 기묘사화로 옥에 갇혔을 때 공장(供狀 옥중에서 진술한 말)이라고 일종의 최후진술을 했지.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력들과 권력만을 잡으려는 집단의 야욕에 맞서 국맥을 바로 잡으려했을 뿐 결코 다른 뜻은 없었다'고 말일세. 내 한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마는 그때 사약을 받고 쓴 절명시(絶命詩)로 대신하겠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였고(애군여애부 愛君如愛父)/나라 걱정하기를 마치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우국약우가 憂國若憂家)/밝은 해 이 땅에 내려(백일림하토 白日臨下土)/내 일편단심의 충심을 밝고 빛나게 밝히리(소소조단충 昭昭照丹衷)”
벽초 선생님의 목표가 성군(聖君)을 만들어 명도(明道)를 실현해 백성들을 위한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결국 실패하신건가요? 사실 세종이나 정조 정도의 성군 말고는 대부분의 왕들이란게 두려움과 의심이 많고 간신들에게 휘둘리는게 역사였던 것 같습니다만...왕의 문제입니까 신하의 문제입니까?
정암 실패라, 그리 생각하나? 공자께서 천하를 주유하고 나서 68세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 와 깊은 병이 들었을 때 제자 자공이 병문안을 가자 눈물을 흘리면서 '태산은 무너지는가/양주(梁柱)는 꺽이는가/철인(哲人)은 시드는가'라고 노래하며 "아아, 천하에는 오랫동안 도(道)가 없구나" 라고 했다지. 지란지교(芝蘭之交)의 벗 양팽손(梁彭孫, 조선의 학자이자 화가, 기묘사화시 면직당해 고향 화순에 내려와 학문)이 죽기 전 날 찾아 왔을 때 그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눈물을 쏟더군. 천하의 공자도 그랬는데… 군주시대에 신하의 존재란 그런 것일세. 한때 왕도정치 대가인 맹자를 열심히 공부했지. 결국 나는 중종을 설득해 폭군 연산군시대의 적폐를 거두고 개혁을 하도록 했지 않는가! 왕의 한계는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신하의 한계도 있는 법!
벽초 후세에 정암선생님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다르죠. 요순(堯舜) 이상국가를 실현하려 했던 최고의 개혁정치가라는 평가도 있는 반면 현실정치를 무시한 이상주의자다는 평가도 있죠. 퇴계 이황은 '천품이 뛰어나고 옳은 정치를 하였으나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구신들을 물리치려 함으로 화를 입게 되었다'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무리한 정치추진을 날카롭게 지적했죠. 율곡 이이도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계로 나갔다'고 안타까워했지요. 물론 후세의 거의 모든 학자나 정치가들이 정암선생의 삶에 찬사와 존경을 보내 결국 선조때 신원이 회복되어 영의정을 받았고 성균관 문묘에 배향이 되었습니다만, 이런 평가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요?
정암 허허~ 그런 평가를 한 퇴계나 율곡도 내 제자들에 다름없다네. 나는 경세가나 권력가가 아니라네. 나는 천지의 도(道)인 공자의 도를 쫓아 지극히 바른 정치인 지치(至治)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온 몸을 바쳤지. 여보게, 그리고 대인은 후세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네. 옳은 실천만 있을 뿐이네!
벽초 역시 고매한 정신 따를 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첩을 두지 않고 한 부인하고 살았다지요. 워낙 잘 생기고 멋져 어느 부인네가 비녀를 선물해 유혹을 했는데도 넘어가지 않고 비녀를 시렁에 걸어두고 도망쳐 놀림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정암 소학(小學)을 읽어 보았는가? 내 스승인 김굉필선생은 별명을 소학동자라고 쓸만큼 사람의 도리와 생활규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원리를 밝힌 소학을 중시했다네. 부패한 연산군시대를 보낸 조선에서 도덕정치의 회복보다 큰 일이 없었지. 나부터 도덕을 실천해야지. 허나 내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은 아니라네 하하하.
벽초 그래서 선생님은 군왕이 가져야 할 덕목의 핵심으로 '명도(明道)' '근독(謹獨)'을 이야기하셨는데 대학(大學)의 명덕(明德)과 신독(愼獨)과 비슷한 개념 아닙니까?
정암 바로 그렇다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이치를 환히 밝혀 그 '명도'를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법이라네. 또 학문하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더라도 늘 삼가는 '근독' 비슷한 말로 신독을 해야 자신도 속일 수 없는 순수함을 실현하지 않겠는가.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서면 공자의 말처럼 '3개월이면 충분하고 3년이면 다 이룰 수 있다'고 나는 중종께 이야기했지.
벽초 그 말에 완전히 반한 중종이 선생님을 서른넷에 발탁하여 조선정치에 일대 개혁을 시도했는데 현량과 설치를 통한 인재발탁, 김굉필 정몽주등 과거 충신 선현들의 명예회복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 소격서철폐를 통한 유학이념 공고화, 거짓 공훈 조작으로 세도를 키우는 세력이 만드는 가짜 공훈인 위훈삭제를 통해 정치개혁을 강력하게 시행했었죠. 기득권 훈구파들의 반발 속에서 신진 사림들에 의하여 4년 동안 이룬 개혁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결국 그 급격한 개혁드라이브가 훈구파들에 의한 반정인 기묘사화로 선생님과 사림을 몽땅 죽이는 발단이 되기도 한 셈이죠. 나뭇잎에 약을 발라 벌레들이 먹어 만들어진 '주초지왕(走肖之王, 조광조가 왕이 되려는 역모가 있다는 모함)'은 어찌 보면 그냥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고 실제는 치열한 권력투쟁 아니었습니까?
정암 나는 중종을 경연을 통해 개혁을 하도록 가르쳤네. 그런데 항상 군자의 도리만 강조하며 가르치려고만 하는 나한테 좀 질렸을 거야. 거기다 신진사대부들이 커져가는 것도 두려웠겠지.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세력이 중종을 갖고 놀아 견제하려고 나를 밀어준 건데 우리 세력이 커지고 거기다 보통 깐깐해야 말이지. 거기에 간신들이 때를 기다려 불을 붙인 거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처럼 사림세력이 성공에 너무 집착해 있었는지 모르겠네. 우리는 용기 있는 의로운 도학정치가이지 전략가들은 아니었어!
벽초 저는 선생님이 하신 일중 향약을 도입한 것을 높게 평가합니다. 오늘날로 보면 지방자치를 실시한 것인데 그래서 정암을 최초로 지방자치제를 도입한 분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향약과 지방자치론을 계승하여 지방자치 아카데미를 전국 각 지방에 부흥했으면 하고 귀양지인 화순에 그 근거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정암 좋은 생각이네. 분권과 자치는 동시에 이루어져야지. 중앙의 권한을 지방에 위임하고 동시에 지역민들이 향약정신에 따라 스스로의 자주 자립역량을 만들어야 한다네. 지금도 그게 잘 안되고 있다지. 내년 개헌안에 그걸 꼭 집어넣고 개헌 뿐 아니라 좋은 현량(賢良)들을 선출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나.
벽초 조광조선생님의 천인무간(天人無間)! 하늘의 밝은 뜻이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니 사람이 먼저 달라져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여, 이제 정암선생의 말에 귀 기울일지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지역미래연구원 원장 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국장 인문학 시민기자 김영집
옳은 나라
인재 등용
지방 강화
조광조가 권하는 나라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그 첫 권은 왕도(王道)라는 제목으로 조광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왜 최인호는 정도전 김굉필 이황 이이 정약용 등 수많은 유가 정치인들을 제쳐두고 정암을 처음으로 내세웠을까?
책을 읽다보면 그 이유는 바로 천지의 도인 공자의 도를 실현하고자 온 몸을 내던진 진정한 유학자가 정암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생각해보니 오늘의 시대가 폭군 연산군 뒤 중종시대처럼 부패한 박근혜 뒤 문재인시대와 오버랩된다. 그 시대에 부패한 시대의 적폐를 씻고 도덕국가를 통한 새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조광조의 개혁이 있었다면, 오늘은 어떤 사상과 개혁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조광조가 오늘에 권하는 나라가 있을 법하다.
첫째가 옳은 나라다. 조광조는 지극히 옳은 지치(至治)의 나라를 추구했다. 지금을 생각한다면 지치까지도 원하지 않는다. 바른 정치(正治)의 나라만 되어도 좋겠다. 이명박 박근혜정부의 비정상적 부패가 하도 깊어 정상적인 일만 해도 국민이 박수칠 정도이니 이번에 드디어 국민상식에 맞는 바른 나라를 만들어 보라고 조광조는 권할 것 같다.
둘째, 조광조 개혁정치중 하나인 현량과같은 새로운 인재등용제를 실시하기를 권한다. 옛날의 과거가 지식위주의 시험제도를 통한 인재선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은 기회는 더 공평해졌으나 시험제로 인사를 뽑는 것이 마찬가지다. 정암은 공부 잘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어진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실천력있는 인재를 뽑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서울보다 지방인재 발탁에 애를 썼다. 최근 이루어지는 새정부의 인사도 국회의원, 서울, 교수와 관료출신 위주 발탁이 주로 이루어지는 것은 조광조가 권하는 인재등용책에 못 미치는 것은 아닐까.
셋째로 조광조가 도입한 향약이다. 향약은 한마디로 지방자치의 협약이다. 뿌리가 약한 중앙권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분권과 자치를 통해 지방을 강화시키는 것이 새나라에 매우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도 그렇다. 수도권 초집중사회와 중앙권력위주의 행정으론 불균형적이고 허약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도 지방이 튼튼한 분권과 자치의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한다.
조광조는 발탁된 4년간에 엄청난 개혁정치를 펼치며 새로운 나라로 나아갔지만 훈구파 구신들의 반정인 기묘사화로 개혁연속엔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치는 빛났다.
5년은 길지만 또 짧은 시간이다. 문재인 국민의 정부가 조광조 4년의 개혁과 좌절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개혁의 성공이 보수의 반격이 아니라 개혁의 연장이 될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조광조를 다시 살펴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