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자료실

정암 조광조 선생 서세 500주년기념 학술회의<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

벽초 0 1,763 2020.01.08 01:07
정암 조광조 선생

서세 500주년기념

학술회의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

 

●일시 : 2019. 12. 26. 목. 13:00 ~~~

 

학술회의내용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 간 내 용

13:00~13:30 접 수

●개회

13:30~13:50 국민의례 / 환영사 / 인사

●기조강연

13:40~14:10 조선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정암 조광조의 위상

정옥자(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주제발표

14:10~14:30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강진갑(경기학회장,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14:30~14:50 정암 조광조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소재 고찰

윤유석(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선임연구원)

14:50~15:10 서원의 가치 구분과 활용기획 전략 : 심곡서원 중심으로

신창희(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컬창의산업연구센터 연구원)

 

15:10-15:20 휴 식

●토론

15:20~16:20 좌장: 박홍갑(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토론:

김성하(경기연구원 연구위원)

김장환(용인문화원 사무국장)

김광옥(심곡서원 장의)

 

목차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조강연>

조선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위상 ················· 9

정옥자(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주제발표>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 23

강진갑(경기학회장,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정암 조광조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소재 고찰 ···························· 33

윤유석(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선임연구원)

서원의 가치 구분과 활용기획 전략 : 심곡서원 중심으로 ····················· 49

신창희(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컬창의산업연구센터 연구원)기조강연

 

조선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위상

 

●정옥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기조강연 | 조선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위상 9

●조선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위상

정옥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목 차 >

1. 조선왕조의 기본성격

2. 사림의 등장과 학계·정계의 재편

3. 기묘사화(1519년)와 정암 조광조(1482-1519)

4. 정암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

 

1. 조선왕조의 기본성격

 

조선왕조는 유교사회라는 점을 가장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유학 중에도 이념성이 가장 강한 성리학을 국학으로 한 사회였고 그 주도층은 사대부였다. 사대부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목표로 삼아 성리학을 전공하여 관료가 된 이들이다. 이들은 선비로서 문·사·철(文·史·哲)을 전공필수로 하고 시·서·화(詩·書·畵)를 교양필수로 한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품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같은 성리학적 인성론이 그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사대부가 주도하는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문치주의(文治主義)였다. 글로서 다스린다는 의미의 문치는 정치에 있어서 학식과 논리가 중요하고 기록을 중요시하는 풍토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무력은 국가방위의 최소한만을 추구하고 도덕적 문화국가를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문화가치가 무엇보다도 중요시된 시대가 바로 조선시대이고 많은 유물들이 그 문화의 독창성을 증거하고 있다.

 

조선의 풍물과 인물을 묘사한 문학적 성취, 조선화한 그림인 진경산수화와 진경풍속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민화, 조선화한 글씨체인 동국진체, 이를 기초로 보편성을 추구하여 완성도를 높인 추사체, 화려한 장식성을 배제하여 천연의 나뭇결을 살리되 못하나 쓰지 않고 파서 끼워 넣는 결구법으로 단단하게 짜여진 간결한 목가구, 흰색에 푸른색의 문양을 그려 넣어 맑고 깨끗한 선비정신을 표현한 청화백자, 자연친화적인 주택, 자연에 약간의 인공을 가미한 정원 등이 조선시대 문화의 독자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시대 가치기준은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에 있었다. 의리란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로서 이에 어긋나는 행위는 치욕으로 인식되었다. 명분이란 이름에 걸 맞는 분수를 말하는바, 명분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조차 초개같이 여기는 것이 진정한 선비의 길이었다. 따라서 조선사대부들의 정치생활은 살벌한 명분싸움의 연속이었다.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명분과 실리를 합치시키려는 노력을 하였고 양자가 합치되지 않을 때는 명분을 선택하는 것이 명분사회에서 사대부가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였다. 근대이후 조선시대의 가치가 도착되어 의리는 깡패용어로, 명분은 핑계로, 선비의 기개를 뜻하는 사기(士氣)는 군대용어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언어도착 현상이야말로 조선적 가치관에 대한 반작용이다. 정치적으로는 왕도(王道)정치를 추구하였다. 왕도의 반대는 힘으로 억압하는 패도(覇道)이다. 왕도정치는 덕치(德治)와 동의어이다. 힘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리고 명분으로 구성원을 설득하는 백성 친화적 정치를 말한다. 왕을 비롯한 사회주도층이 솔선수범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서 교화(敎化)를 통하여 개개인의 자율성을 제고하여 백성을 이끌어 가는 정치를 말한다. 개인의 욕심을 절제하고 도덕적 심성을 길러 모든 구성원이 더불어 살아가는 유교적 이상사회인 대동사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오늘날은 법치(法治)를 최고의 정치형태로 간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덕치의 보조수단으로 법치를 썼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가 우선순위에 놓였다. 물적 기초가 생존의 기초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것을 최고 가치로 삼을 때 생기는 부작용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현대사회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물적 기초를 최우선 가치로 하여 이익이 모든 일의 잣대가 되는 저질사회가 되어 인간의 삶이 황폐해지는 현상과 대비된다. 조선은 칼을 든 무사의 나라가 아니라 붓을 든 선비의 나라였고, 힘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성에 기반을 둔 논리로서 통치하는 평화 지향의 문치주의(文治主義)국가였다. 자급자족하는 농경사회로서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였다. 앞으로 지식기반사회에서 이 역사적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 기대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조선사회는 우리 역사상 가장 인간다운 삶을 성취한 시대였으며 현대사회와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한 사회였다. 우리의 뿌리를 밝히는 작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비춰보는 반면 거울로서 조선시대 역사연구는 유효하다. 조선사회가 왜란과 호란 두 번의 전쟁 후에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이야말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지혜와 해법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자신감을 다시 찾아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여 세계의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이때 우리의 방향성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법고창신의 길은 유효하리라 굳게 믿는다.

 

2. 사림의 등장과 학계・정계의 재편

 

조선은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아 출발하였다. 유학이 한자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였지만 관료제와 과거제도 등 국가 운영에 실용학문으로 활용되었을 뿐, 통일신라는 물론 고려까지 불교의 나라였다. 신유학인 성리학이 고려말기 신진사대부에 의하여 이해되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왕조를 건국하자 비로소 성리학 이념은 조선왕조의 국시가 되었고 새로운 학문으로 학습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난해한 성리학의 우주론인 이기론(理氣論)등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조선초기에는 고려유학의 전통으로 익숙한 한당유학이 아직 온존하고 있었다. 성리학은 집현전에서 국학으로 장려되었지만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과 불교의 복권으로 한걸음 퇴조하였다. 그 핵심세력으로 자라고 있던 집현전 학사들인 사육신의 죽음이 그 결과였다. 성종은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려는 의도와 함께 권력이 비대해진 훈구파에 대한 대항마로 경상도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던 야은 길재(1353~1419)학파 사림을 중앙정계에 적극 끌어올렸다. 이른바 영남사림의 중앙정계 등장이었다. 사림(士林)은 사12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士: 선비)의 복수개념이다. 그러나 이들 사림은 열정과 이상은 높았지만 외래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아직 미숙하다는 한계가 있었고 성리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결국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거쳐 중종 대에는 기묘사화로 대대적으로 사림이 숙청되기에 이른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연산군의 난정을 극복하고 사림의 여망에 부응해야한다는 사명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지나친 이상주의에 멀미를 내고 있던 중 훈구파의 모략으로 결국 사화라는 파국적인 종말로 내달았다. 조광조(1482~1519)는 건국공신 조온의 후손으로 영남사림인 김굉필(1454~1504) 문하에서 공부였으니 사림이 기호지방으로 확대되는 전초가 되었고 영남사림과 기호사림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훈구파로 분류될 수도 있는 공신가문에서 출생하여 기호사림의 원조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사화는 훈구파대 사림파의 대결구도였지만 그 중심에는 왕이 있었다. 훈구파는 조선의 건국부터 기반을 닦을 때까지 국가에 공훈을 세운 정치적 구파였다. 이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역성혁명에 목숨을 걸고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는데 지대한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오른 정치세력이었다. 조선 초의 다난한 정치적 사건들을 해결하여 성종 대에 오면 16차나 공신이 배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훈구파는 고위관직을 제수 받고 공신전을 하사받는 등 권력과 경제력을 아울러 향유하고 왕실과 연혼하여 권력을 강화하였다. 조선 건국 1세기만에 귀족화된 훈구파는 애초의 순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체세력으로 국왕에 의하여 중앙정계에 등장한 사림은 노련한 훈구파의 권모술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번번이 사화를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던가? 사림파는 주기적으로 사화를 당하면서 정치력을 키워갔다. 사화를 당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고 남은 이들은 낙향하여 자식과 제자를 키우면서 다음 시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 치열한 사화기를 거쳐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외래학문인 성리학은 조선의 학자들에 의하여 이해의 수준을 넘어 토착화하는 성과를 보이니 비로소 ‘조선성리학’ 으로 규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른바 퇴·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성리학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여 영남사림의 종장이 되었으니 퇴계학파가 탄생하였다. 퇴계보다 35년 후생인 율곡 이이(1536~1584)는 퇴계를 뛰기어 넘어 조선 성리학의 창신(創新)을 이루어내니 율곡학파가 탄생하였다. 이제 사림은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기호지역까지 확산되고 양대 학파를 이룰 정도로 포화상태가 되자 사(士)가 대부(大夫)가 되려는 속성대로 학파는 정파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퇴계가 중심이 된 영남학파는 동인으로, 율곡이 중심이 된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형성되니 학파는 정파의 모집단이 되었다. 동인과 서인의 두 붕당은 임진왜란 직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됨으로서 삼당 체제가 되었다. 남인이 퇴계학파라면 북인은 화담 서경덕(1489~1546)과 남명 조식(1501~1572) 계열 학자들의 연합체로서 순수 성리학 보다 한당유학에 가까운 학풍이었다.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같은 붕당의 명칭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분당 당시의 여론을 주도하던 중심인물이 서울의 동쪽에 살고 있어서 동인으로, 서울의 서쪽에 살고 있어서 서인으로 불렸으니 속칭이라고 볼 수 있고 문객정치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동교동계니 상도동계니 하고 부르는 것이나 같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나라를 넘보며 조선을 전쟁터로 삼아 일으킨 당대의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세계는 천하라는 용어로 불렸고 천하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를 일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6세기에 와서야 통일을 이루고 그 비대해진 군사력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통일이 된 마당에 막대한 군사력은 내란의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오랜 옛날부터 그들의 꿈인 대륙진출의 야망을 이루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대륙의 명나라가 부정부패와 환관들의 발호로 쇠미해가고 있었고 조선은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권이 바뀌는 혼란기였기에 일본이 그 야욕을 실천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라는 명분을 세워 조선정부를 압박하면서 침략을 단행했던 것이다. 무모한 일본의 도발은 결국 패전으로 끝났지만 7년이나 끈 장기전으로 조선은 초토화되었고 명나라도 이 전쟁으로 국운이 다하여 그 와중에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족의 청에 망하게 되는 등 17세기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선은 학파가 정파로 전환된 붕당들이 분립하면서 남인·북인·서인의 삼당체제로 훈구파에 대체하는 정권교체기에 돌입한 상태여서 전쟁대비에 소홀했던 면이 없지 않았지만, 정부에 진출해있던 사림파관료들에 의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지방에 남아있던 동료 사림들의 의병활동을 독려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성사시켰고, 이순신을 추천하여 해전에서 승리를 이루어내었다. 1598년 정유재란 끝에 국토에서 왜적을 완전히 몰아내었으므로 승리는 승리였지만 만신창이의 승리였고 그 후유증은 깊었다. 전쟁 중에 훈구파는 아무런 구실도 못하였으니 그들의 체질이 귀족화하여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구파는 전쟁 후 논공행상에서 자연히 제외되면서 권력을 상실하게 되고, 전쟁 중에 불타버린 토지대장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훈구파가 2세기에 걸쳐 비정상적으로 축적한 토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과 경제력을 잃은 훈구파는 자연 도태되었고 드디어 사림파의 세

상이 열렸던 것이다.

 

3. 기묘사화(1519년)와 정암 조광조(1482-1519)

 

기묘사화는 연산군대에 일어난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에 이어 세 번째로 일어난 대규모 사화였다. 이 사화들은 성리학을 주 전공으로 하고 그 이념을 정치현실에 실현하고자 하던 사림이 정계에서 주도 세력화하는 과정에서 구청치세력인 훈구파에 의하여 숙청당한 정변들이다. 조선초기에는 문물제도 정비와 외교관계 수립 등 중요과제에 필수적이던 문장력이 우선시되어 사장지학(詞章之學: 문장학)이 대세였다. 훈구파가 바로 사장지학을 주로 하여 사장파라고도 하였다. 이를 비판하고 나선 사림파는 방법론에 불과한 사장지학은 이제 더 이상 긴급한 학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의리지학(義理之學: 인간이 인간답기 위하여 지켜야할 떳떳하고 옳은 도리에 대하여 탐구하는 학문)의 기치

를 높이 들었다. 의리지학이 바로 도학(道學)이니 사림파를 도학파라고도 하였다. 훈구파는 구정치세력이고 사림파는 신정치세력이니 전자는 보수파, 후자는 개혁파로서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전자는 1세기 이상 그 세력을 키워온 기성세력이고 후자는 이제 막 새로운 이상과 개혁의지를 품고 부상하는 신진세력이었다. 그 개혁과 보수 갈등의 극점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그 중심에 정암 조광조가 있었다.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은 조선왕조 최초의 반정(反正: 정치를 바르게 돌이켜 놓는다)으로 유교적 정변이다. 반정이란 통치자가 정당성을 잃었을 때 쫒아내고 왕실에서 적격자를 뽑아 왕으로 추대하는 방식이다. 정변을 일으킨 당사자가 권력을 쟁취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신하는 신하의 명분을 지켜야한다는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것이다. 연산군의 난정으로 촉발되어 일어난 반정의 왕 중종은 그 난정을 바로 잡아야 할 난제를 안고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1세기가 경과하면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재검증하고 개혁해야 할 시점에 직면해 있었다. 조광조는 바로 이러한 국가적 여망에 부응하여 신진사림파의 기수로 정계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사림파가 중종의 지지를 받으며 중종의 조정에서 국정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중종의 반정을 주도한 반정공신들이었고, 결국 그 반정공신들을 아우르는 훈구파라는 거대한 암초에 걸려 좌초한 것이다. 사림파에게 있어서 훈구파인 반정공신들과의 권력투쟁은 피할 수 없는 개혁의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이다.바로 위훈삭제(僞勳削除: 거짓공훈을 깍아버림)사건이었다. 1519년(중종14년) 사림파 소장관료들은 중종반정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거짓 공훈을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반정공신의 4분의3에 해당하는 76인의 훈작을 삭탈하자는 것이었다. 더구나 기존의 과거제도가 연공과 문장력을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므로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새로이 설치한 현량과(賢良科), 향촌사회의 상부상조하는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한 여씨향약(呂氏鄕約), 미신을 타파하기 위한 소격서(昭格署)의 철폐 등 사림파가 추진하던 급진적 개혁정책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반정공신 중심의 훈구파는 이에 맹렬한 반격에 나섰다. 홍경주·남곤·심정 등 훈구파는 후궁인 경빈 박씨를 통하여 중종에게 무고하도록 사주하고, 궁녀를 시켜 대궐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되려한다)’ 네 글자를 꿀물로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여 중종에게 바치도록 하는 한편, 밤에 신무문을 통하여 대궐에 잠입하여 중종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비방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파의 개혁정책에 기본적으로는 찬성하고 지지하였으나 그 과격성과 방법의 미숙성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도의(道義)의 기치를 높이 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고 성현을 본받아 지치(至治: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여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지치주의를 주창하면서 자신에게도 끊임없는 수기(修己)를 통하여 철인이 되어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사림파에게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왕위에 올린 반정공신 다수의 공훈을 깎아 버리겠다고 나서는 사림파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반정공신 역시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드디어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사림파를 처벌하기에 이르니 기묘사화이다.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김식·김구·윤자임·박세희 등 사림파는 투옥되어 사약을 받거나 유배되었다. 이들의 명단은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에 올라있다.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과 함께 사사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적극적인 비호로 목숨을 건지고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남곤·이유청 등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된 후 그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에 사사되었다. 기묘사화는 사림에게 큰 충격이었다. 앞의 무오사화나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난정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지만, 기묘사화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개혁의 아이콘인 조광조와 그 일파인 사림을 축출한 처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을 눈앞에 두고 물거품이 되었다는 좌절감과 함께 희생된 사림의 규모도 가장 컸으니 주요 인물만도 100명이 넘었다. 이에 조광조일파의 시행착오는 후대 사림의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이는 낙향하여 자식과 제자를 키우면서 후일을 도모하였다. 고향에 은둔한 사림은 선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학문적 깊이를 더하기 위하여 주 전공인 성리학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들이 거름이 되어 다음 세대에는 사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4. 정암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

 

조광조는 1482년(성종13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원강(元綱),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고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손이다.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孝直 ),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여 남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성을 보였다. 보통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사람들은 “미친 사람(狂人)”, 또는 “화의 태반(禍胎)”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상식을 뛰기어넘는 언행으로 친구들과의 교유관계까지 끊어질 정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치열한 학행에 몰두하였다. 항상 의관을 단정히 하고 언행에 절제가 있어서 ‘품행

이 방정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모범생이었다. 17세에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만나 수학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정여창과 함께 정몽주-길재-김종직으로 계승된 영남사림의 학통을 잇는 핵심인물이었다. 이 만남은 개국공신의 후예로 훈구가문 출신이고 서울 태생인 조광조가 영남사림의 학통과 관계를 맺는 운명적인 것이 되었다. 1510년(중종5년) 29세에 소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관학재생이 되어 공부하던 중 동료유생들의 성망에 힘입어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추천으로 1515년(중종10년) 34세로 조지서 사지(司紙 )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대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주로 언관직을 수행하면서 그야말로 적폐청산에 나섰던 것이다. 기묘사화 때 그의 직책, 즉 마지막 직책도 언관인 사헌부 대사헌이었다. 사약을 받고 읊은 절명시가 남아 있으니 다음과 같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愛君如愛夫)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처럼 하였네.(憂國如憂家)

밝고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昭昭照丹衷)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화에 희생된 조광조는 조선왕조 내내 선비의 사표로서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았다. 사림의 시대가 열린 선조대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어 복권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림의 모범으로 추앙받기에 이른 것이다. 후배 사림파는 지속적으로 그의 추모 사업을 벌였으니 그가 유배되어 사사된 능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도봉서원, 김굉필을 만난 희천의 상현서원, 그의 묘소가 있는 용인의 심곡서원 등 그의 연고지에 있는 서원을 비롯하여 전국 20여 곳의 서원에서 그의 제향을 모셨다. 조광조를 사숙하고 계승한 율곡 이이는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야 이론을 실천하였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고 평가하였다. 학문이 익어서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토대가 확실해야 성공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보다는 아직 사림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만한 시대적 분위기가 무르익지 못했던 탓이 컸던 것이 아닐까 싶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많은 지식인이 동의할만한 시간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법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되어 1세기가 지난 시점이었지만 성리학은 일반백성에게는 낯선 외래사상이었고 정치세력도 문장학을 주로 하는 훈구파가 주류였다. 성종대가 되어서야 성리학의 어린이 수신교과서인 <소학>을 어려서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사림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성리학적 이념이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거기에 기득권세력화한 훈구파의 적폐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조급하게 추진한 개혁정책의 과격성과 그 방법의 미숙성이 역작용을 초래했던 것이다. 정암후대 사림사회에서는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하여 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 네 분을 조선전기의 걸출한 선비로 기리고,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조선오현(朝鮮五賢)’이라 하여 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송시열 다섯 분을 꼽았다. 조광조의 치(治: 정치), 이황의 도(道 : 도학), 이이의 학(學: 학문), 김장생의 예(禮 : 예학), 송시열의 의(義 : 의리)를 조선선비의 이상으로 평가하여 역할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조광조는 두 그룹에 모두 선정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토대로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요약하여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만세선비의 사표로서 선비의 역할모델로 평가 받았다.

둘째, 개국공신의 5대손으로 공신가문 출신이면서 훈구파에 매몰되지 않고 사림의 기수가 되어 사림파의 이정표를 세웠다.

셋째, 영남사림과 기호사림의 교량역을 하여 기호사림의 원조가 되었다.

넷째,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에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다섯째, 당대보다 후대에 더욱 높이 평가받으며 추앙되었다.

여섯째, 개혁추진의 과격성과 방법의 미숙성으로 인한 실패로 후대 사림에게 경종을 울리고 실패한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를 일깨워 주었다.

 

[참고서적]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선비>(2002년, 현암사)

정옥자 <지식기반 문화대국 조선>(2012년, 돌베개) 주제발표1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강진갑

(경기학회장,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주제발표2

|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23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강진갑

(경기학회장,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 목 차 >

1. 머리말

2. 동아시아 문화사 시대 구분

3. 동아시아 부상과 유교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

4. 동아시아 유교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

5. 맺음말

 

1. 머리말

 

세계사의 구조가 재편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이를 촉발시킨 것이 동아시아의 급격한 부상이다. 동아시아 부상의 중심은 중국과 한국이다. 동아시아는 유교 문화권인데 동아시아의 부상이 유교와는 무관한 현상은 결코 아니다. 이제 동아시아의 부상에 발맞추어 학계에서는 한국 나아가 동아시아가 당면한 현실 문제를 유교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있다. 이 글은 이 같은 학계의 동향의 일단을 소개한 글이다

 

2. 동아시아 문화사 시대 구분

 

동아시아는 유교문화권인 한국, 중국, 일본 3국을 지칭한다. 춘추전국시대 공자24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에 의해 성립된 유교는 한나라에 이르러 중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후 중국 유교는 한자와 함께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한·중·일 3국은 유교문화를 공유하는 동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역사는 크게 4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제1기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유교문화시대이다. 이시기는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라고도 부른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공자에 의해 유교가 발생하였다. 중국은 유교문화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국력도 다른 2개 국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중심은 중국이었다. 1592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고 동아시아를 일본 중심 체제로 변환시키려고 하였으나 조선과 명나라 군대가 합동하여 일본군을 격퇴함으로써 기존의 동아시아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 한국과 중국은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과거를 통해 관료를 선발하였다. 일본도 과거제를 실시하였으나 한국, 중국과 달리 하급 귀족이 응시하여 합격자는 중급 귀족으로 신분 상승하는 정도로 제한적으로 실시되었다. 유교사회는 교육을 강조하였으며, 교육받은 학생을 과거를 통해 선발하여 관료로 등용하였다. 한국과 중국은 우수한 인재가 관료가 되었으며, 관료제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는 교육 제도가 뒷받침하는 관료제도가 발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조선시대는 국가체제부터 문화와 사상 모든 것을 유교 사상이 지배하였으며, 유교는 한국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하였다. 유교는 조선사회를 지식 기반 문화국가로 만들어 주었다.1)

그러나 18,9세기 들어 세계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쳐 유럽이 주도하는 새로운 근대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 시기 서양의 과학이 조선사회에 전래되었다. 서양의 과학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도 전래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는 3국가의 태도는 달랐다. 조선은 “천주교의 화는 홍수와 맹수와 같다”며 천주교를 배척하면서 서양 과학도 수용하지 않았다. 일부 선각적인 실학자는 서양 과학에 수용적 입장이었으나 정부 관료를 포함한 대부분 지식인들은 성리학이 조선 사회의 문명을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일본은 천주교를 배척하였으나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였다.

 

1) 정옥자, 2012, 『지식기반 문화대국 조선』, 돌베개, 6∼64쪽.

주제발표2 |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25

 

1720년에는 서양의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여 기독교 서적을 제외한 서양 서적을 적극 수입하였다. 중국은 서양 과학을 수용하는데 조선과 일본 중간 정도의 입장을 취하였다. 동아시아 3국의 서양 과학 문명에 대한 태도 차이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아시아 3국이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2)

제2기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세계의 제국·식민지 시기이다. 1894년 청일전쟁 결과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동아시아는 일본 중심의 ‘제국 체제’로 이행하였다. 일본은 제국이 되어 조선을 식민지, 중국을 반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한 시기이다. 조선은 1876년 개항 이후에도 서양문명을 받아들였으나, 정부의 리더십이 부족하였고 받아들이는 속도도 늦었다. 유교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반침략에는 충실하였으나, 근대화에는 장애가 되었다. 19세기 조선 사회 근대화의 지연은 20세기 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유교가 조선 사회 식민지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3)

동아시아의 문명국가로 자처한 한국과 중국의 일본 식민지와 반식민지로의 전락은 양국 국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 유교는 한중과 중국 양국에서 철저히 배척되었다. 중국인은 유교를 곰팡이와 같다고 하였다. 제3기는 1945년 이후 동아시아 세계의 분단시기이다. 1945년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면서 동아시아 세계의 제국·식민지 시기가 종식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해체되고, 조선은 식민지에서 해방하였으며, 중국은 반식민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한국은 남북한으로, 중국은 대만과 분단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인 중국, 쏘련, 북한과 자본주의 세력인 한국과 미국, 일본이 대립하였다. 대립의 기조는 이념 대립이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실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남한은 일본의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을 발전시켰다. 실학은 자본주의 맹아론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서는 학계에서 조선시대 유교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4).

 

2) 강진갑, 2015, 「진정한 광복은 ‘통일’(상)」, 『인천일보』 2015. 8. 24.

3) 강진갑, 2019, 「21세기 한국 사회 유교의 과제」, 『2019 설봉서원 4현의 생애와 사상』, 설봉서원·경기학회·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13쪽26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

 

그러나 중국에서는 유교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이었다. 문혁시대에는 공자상이 파괴대상이 되었고,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일어났다. 비림정풍(批林整風)운동과 비공(批孔)투쟁을 결합시킨 말이다. 공자와 묶어 린뱌오를 ‘지주·자산계급의 전제’를 복귀시키려한다고 공격한 운동이다. 그러나 실상은 중국 공산당 내의 반마오·장칭집단(反毛江靑集團)에 대한 문혁 사인방(四人幇)이 적대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데 운동이었다. 제4기는 1990년대 이후 세계체제의 변화와 동아시아의 부상시기이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은 개혁 개방정책에 의해 자본 체제를 도입하고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여 21세기에는 미국과 더불어 G2 국가로 성장하고 있다. 초기에 미국은 사회주의국가로서의 중국의 위협을 봉쇄하기 위해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 진출을 환영하고 도왔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중국이 급성장하고, 국가총생산에서 일본을 앞질러 미국과 더불어 G2 국가가 되자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3억이 넘는 인구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성장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그동안 전 세계에서 행사해 온 미국의 주도권 상실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전 세계 체제가 요동을 치고 있다. 19세기에 유럽이 전 세계 대부분 지역을 식민지로 장악하였고, 20세기에는 유럽 이민들이 세운 국가인 미국이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동아시아의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미국의 패권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 같은 성장에 자신을 가지고 그동안 버려두었던 유교를 다시 중국 사회로 소환하고 있다. 중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유교는 중국 중심주의에 갇힐 우려가 있다. 보편적 문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유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유교 전통을 단순히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5)

 

4) 강진갑, 2014, 『향교·서원과 용인사람들』, 도서출판 선인, 21쪽.

5) 나종석 외, 2014, 『유학이 오늘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가』, 도서출판 혜안, 7-8쪽.

주제발표2 |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27

 

유교에 대한 한국의 인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유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다. 2014년 아산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유교의 상징인 선비 정신이 한국 사회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한국인이 75%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6) 같은 해 한국관광학회 유교문화 활성화지원 사업단의 여론 조사에서도 한국 유교가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여기는 한국인이 42%가 된다는 결과가 나온 곳이 그것이다. 2014년 한국관광학회 유교문화활성화 지원 사업단의 조사에 따르면, 유교가 전반적으로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와 ‘매우 그렇

다’라는 긍정적인 응답이 42.0%, ‘그렇지 않다’와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부정적인 응답이 22.6%로 나왔다. 유교가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가치관 중 유교적 가치관이 갖는 위상에 대한 질문에 대해 ‘매우 높다’와 ‘높다’라는 응답이 34.1%, ‘보통이다’가 46.3%, ‘매우 낮다’와 ‘낮다’가 19.6%로 나타났다. 유교가 한국 사회 가치관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는 보통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회 발전을 위해 유교적 가치관을 계승하고 발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렇다’와 ‘매우 그렇다’라는 긍정적인 응답이 43.2%, ‘그렇지 않다’와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부정적인 응답이 15.3%하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가치관 중 유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은데, 앞으로 한국 사회가 유교적 가치관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이 많음을 보여주는 통계이다. 한국인들이 유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이 바뀌는 것은 한국 사회가 성장하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고취되고 있는 것과 연결되는 결과이다.7) 실제 이 시기 한국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2017년 한국은 30-50클럽에 가입하였다. 30-50클럽은 인구가 5천만 명 이상이면서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인 나라를 지칭한다. 2018년 말 현재 ‘30·50클럽’에 가입한 국가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한국 등 총 7개국이다. 이 중 식민지를 거친 나라 중 30-50클럽 가입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의 성장이 전통문화에 대한 긍정적으로 평가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8)

 

6) 「국민 75% 선비정신 중요」, 『중앙일보』 2014. 2. 23.

7) 강진갑, 「21세기 한국 사회 유교의 과제」, 14-15쪽.

8) 강진갑, 「동아시아 해양-대륙세력 격전지… 한반도 '분단 법칙' 벗어던지기」, 『중부일보』 2019. 12.

24.28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

 

3. 동아시아 부상과 유교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

 

1990년대 이후 세계체제의 변화와 동아시아의 부상시기의 핵심은 중국과 한국의 부상이다. 동아시아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동아시아인들이 세계사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성장 선두 주자는 19세기 동아시아를 식민지 지배하는 제국이 되면서 시작한 일본이었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국가총생산이 일본을 앞지르고, 미국과 더불어 G2 국가로까지 성장하고 있다. 한국의 성장도 괄목할 만하다. 특히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한국이 식민지 지배를 하였던 일본과 경제 격차 줄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2019년 명목상 국내총생산 순위가 세계에서 10위이고, 교역액은 세계에서 9위이다. 양국을 비교해 보면, 국내총생산은 2018년 일본이 48,919억 달러이고 한국은 17,201억 달러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2.8배 많다. 2018년 일본 인구는 1억 2천718만 명이고, 2019년 한국 인구는 5,171만 명으로 일본이 2.6배 많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2018년 한국은 33,346달러이고, 일본은 39,605달러로 일본이 한국보다 1.26배 많다. 일본인구가 한국인구보다 2.6배 많은데, 국내총생산은 2.8배 차이가 나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1.26배 차이가 난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이 인구수만큼 차이가 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 경제는 성장을 하고 있으나 일본 경제가 정체 되어 있기에 1인당 국내총생산의 차이는 계속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9)

동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대만 등이 모두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한 국가이다. 이들 국가의 경제 발전과 유교 문화와의 상관관계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10)

 

9) 강진갑, 「동아시아 해양-대륙세력 격전지… 한반도 '분단 법칙' 벗어던지기」.

10) 康鎭甲, 2018, 「阳明学的城市,始兴,是怎么做的?」, 『中国·贵阳 2018年 第六届知行论坛 ‘东亚儒

学的现代性转化 & 阳明学与文化区域构建’ 国际学术大会』, 贵阳孔学堂文化传播中心·贵阳学院阳明学

与黔学研究院·贵州省儒学研究会·江苏省儒学学会·贵阳学院学报·韩国阳明学会·韩国忠南大学儒学研究

所·韩国始兴文化院. pp366∼367.

주제발표2 | 동아시아 유교의 새로운 이해 29

 

21세기 동아시아 정치에서 한국 민주주의 발달은 눈 여겨 볼 부분이다. 동아시아 국가인 중국, 일본, 북한 가운데 한국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하였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유교는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 발달에 장애로만 작용하였는가? 이제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 사회가 이룬 성과와 한계를 유교 측면에서 정리하고 연구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유교 민주주의, 유교 자본주의가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한말 더 나아가 유교 자체가 21세기 인류 문명에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

지에 대한 연구도 시도되어야 한다.11) 이러한 새로운 문제제기에 대해 답변하는 유교 연구서들이 간행되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 동아시아 유교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

 

동아시아 유교에 대해 최근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생산되고 있다. 먼저 김상준 교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 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이 있다. 김상준 교수에 따르면 세계문명이 거대하게 전환하고 있으며 재편되고 있다, 그 핵심은 서구 문명 중심에서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의 부상이다. 새 천년 들어 대두된 거대한 전환의 움직임이다. 대전환의 이 두 측면은 서로 의미 있게 연관되어 있는가? 즉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은 문명 판도의 지구적 재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김상준 교수는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성취를 인류 보편적 가치의 좌표 위에서 재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유럽 근대문명만이 순수한 근대고, 비유럽 근대문명은 순수하지 못한 근대라는 발상과 논리를 비판한다. 동아시아에서도 근대문명의 기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간 봉건시대의 사상으로 간주된 유교를 근대문명 기틀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12)

다음으로 박영도·정일균·백영서·조경란·나종석 교수 공저인 『유학이 오늘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가』가 있다. 이 책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 전통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공공성의 논리를 오늘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연구이다. 이 책은 크게 오늘날 동아시아 사회의 중요한 세기 세 가지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하나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해 유교가 어떤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 가이다. 다음으로는 ‘공공성의 위기’에 대해 유교가 어떤 방식으로 대답을 줄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현대 동아시아에서 유학 및 유교의 존재 방식 연구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남북한 사회에서의 다산 정약용 연구를 살펴보고 있다. 정약용 연구가 남한의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북한의 사회주의적 근대화 관련되어 있음을 밝혔다.13)

 

11) 강진갑, 「21세기 한국 사회 유교의 과제」.

12) 김상준, 2011,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 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아카넷.30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

 

이황직 교수의 『군자들의 행진』는 유교가 한국 민주주의와 근대적인 사회로의 전환에 장애가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여하였다는 측면에서 연구한 연구서이다. 이황직 교수는 1960년 4·19혁명이 4·25 교수단 데모가 큰 역할을 했는데, 이 교수단 데모의 핵심에 유교 계열 지식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4·25 교수단 데모를 한말 의병전쟁부터 일제하 파리장서운동, 1960년대 민주화운동 까지 유교계의 사회운동사의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이 교수는 조선 식민지화의 원인으로 지목돼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에도 비판을 받았고, 변화를 거부하여 소멸돼 가는 전통 종교의 하나라는 인식을 절반만 인정하고 반기를 들고 있다. 이 문제는 형이상학적 논쟁보다는 역사적인 내용을 근거로 논의를 해야 한다면 한국근대유교지식인 운동사로서 본 서를 연구하고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교수는 학술 영역을 넘어 유교 부흥의 방법 모색하고 있다. 유교인으로서 이 교수는 유교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사상 자원임을 입증하고자 했으나, 유교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하였다. 이 책은 유교가 과거 국가 종교의 환상에서 벗어나, 문중이나 학통의 차이를 넘어서 시민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쟁점에 유교가 개입해서 그 해결방안을 모색해야만 유교는 살아 있는 종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14)

 

13) 박영도·정일균·백영서·조경란·나종석, 2014, 『오늘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가』, 혜안.

14) 이황직, 「유교는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적 전환에 어떻게 영향 미쳤을까?」, 『교수신문』 2017. 5. 8.주제발표2

 

5. 맺음말

 

최근 연구의 특징은 철학, 유학 전공자가 아닌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유교에 대한 연구를 내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제도 유학 자체의 논리가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유교에서 구하려는 시도이다. 이 같은 연구가 있어 유교의 미래는 결코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유교가 이제 한국과 동아시아, 나아가서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정암 조광조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소재 고찰

윤유석(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선임연구원)

주제발표2 | 정암 조광조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소재 고찰 33

정암 조광조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소재 고찰

윤유석1)(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선임연구원)

 

< 목 차 >

1. 들어가며

2. 뒷사람의 태산과 북두

3. 조선 도통의 계보

4. 『소학』

5. 간언하는 충신 조광조

6. 나오며

 

1. 들어가며

정암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 정치를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기묘사화의 주인공으로 주로 이야기 된다. 하지만 서원에서 조광조를 이야기 할 때는 한국의 철학사적 관점 즉 조선시대 유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적 내용은 인물들이 한 행위나 상황이 중심이 되지만 철학적 내용은 그들이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사상과 사유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2017년 전국문화원연합회의 “지역문화콘텐츠 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남한의 37개 비훼철 서원의 배향인물을 중심으로 120여개의 이야기 소재를 집필한 바가 있다. 집필을 하면서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정암 조광조가 갖는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정암이 세운 조선 도학의 체계와 기묘사화 이후 정암을 동방5현으로 추존하는 과정에서 조선 선비들이 만들어간 성리학적 이념에 주목하게 되면서 그들이 사화의 두려움 속에서도 무엇을 살려내고 지키려 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집필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조선 유학사에서 정암 조광조의 의미가 무엇이고 조선의 선비들이 왜 조광조를 배향하며 선현의 가르침으로 무엇을 배우려 하는지 살펴봄으로써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가 기묘사화라는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유학, 조선 선비들의 정신문화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소재로서의 가능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화콘텐츠학 박사, 역사문화자원 스토리텔링 전공, wordspower@daum.net 34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

 

2. 뒷사람의 태산과 북두

조광조는 중종 재위기에 벼슬에 올라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치인(治人)을 통해 하늘의 뜻을 실천하고자 했던 조광조는 유학의 도의(道義)와 문화를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군왕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타협 없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반대파의 역습을 받게 된다. 국문장에서 조광조와 그의 일파는 “자신들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싫어하며, 일의 옳고 그름만을 분별하여 실천하였을 뿐”이라는 말을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했다고 한다.2) 사리사욕 없이 옳고 그름만을 분별해 치인(治人)을 펼치며 도덕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이들의 생명은 굵고 짧게 마감되었다. 기묘사화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유교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 있음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다. 1568년(선조 1) 9월 21일 석강에서 이황은 선조에게 기묘사화가 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3)

 

2) 김정신. 「조광조,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으로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다」, 『내일을 여는 역사』 36,

2009, pp.156-183.

3) http://sillok.history.go.kr/주제발표2 | 정암 조광조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소재 고찰 35

 

“그때의 환란이 지금까지 만연되어 사림들 중에 학행에 뜻을 갖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기묘(己卯)의 유(類)라고 지목하기도 하는데 사람의 마음이 그 누가 화를 무서워하지 않겠습니까. 사풍(士風)이 크게 더럽혀지고 명유(名儒)가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 『선조실록』 2권, 선조 1(1568)년 9월 21일 ‘기묘지류(己卯之類)’, 기묘사화를 입은 선비들과 같은 부류라는 뜻이다. 이황의 말처럼 기묘사화는 선비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그러한 화를 입을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신진 사림들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추구하고자 한 도학(道學)까지 무시되고 외면당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상소 이후 조광조의 신원이 회복되고 서원이 세워지면서 변화하게 된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용인에 이장된 후 37년 후인 1557년(명종 12) 조광조는 용인의 한양 조씨 선산에 묻혔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10여 년 후에 신원 회복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을사사화로 좌절되었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기대승과 이황의 주도로 신원 회복이 이루어져 조광조의 관직 회복과 문묘 종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후인 1576년(선조 6) 조광조는 정몽주와 함께 죽전서원에 배향된다. 재정상의 문제와 지역적인 연고, 거리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었다. 바로 조광조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도통의 계보를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1544년(중종 39) 5월 29일 성균관 생원 신백령은 “우리 도(道)가 동방으로 온 지 오래인데 또한 전승이 있었습니다. 대개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얻었고,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얻었고, 김종직은 전조의 신하 길재에게 얻었고, 길재는 정몽주에게 얻었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조광조의 신원회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신백령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은 조광조가 정몽주로부터 이어지는 도통의 맥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배향될 수 있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죽전서원이 훼손되자 1605년(선조 38) 조광조의 선영이 있는 이곳에 서원용인 심곡리에 심곡서원을 건립해 위패가 옮겨졌다. 조광조를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졌다는 것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심곡서원의 설립은 기묘사화로 꺾인 유학 정신의 회복이었고 선비들의 학풍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선조 초, 조광조는 억울한 죄의 누명이 풀린 36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간과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 끝에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된다. 조선의 선비들이 기묘사화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조광조를 선현으로 세운 것은 그가 남긴 유교적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문집 『경연일기』 에는 율곡이 조광조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4)

“우리나라에 이학(理學)의 전통이 없었는데, 전(前) 왕조에서 정몽주가 비로소 단서를 열었으나 법도(規矩)가 정밀하지 못하였다. 우리 왕조에서는 김굉필이 그 단서를 이어받았으나, 아직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그런데 조광조가 도(道)를 주창하게 되자, 배우는 이들이 모두 함께 그를 추존하였다. 지금 성리학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조광조의 힘이다.”-율곡 이이 『경연일기』 중에서조선에 성리학이 있음을 알게 한 ‘조광조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수련하는 수기(修己)를 통해 개인적으로 도덕성을 실천하고 나아가 관직에 올라 왕을 왕도(王道)로 이끌고,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인도를 실현할 수 있도록 치인(治人)하는 것이 도학에서 중요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개념이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도학을 숭상할 것, 인심을 바르게 할 것, 성현을 본받을 것, 지치를 일으킬 것’을 반복해 강조하였다. 도학사상에 기초해 오직 의리와 정도를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당대 사람들은 조광조를 두고 ‘어진 선비로 천품이 뛰어나고, 착하고, 세상에 드문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품’이라 하였다. 조광조는 인품을 바탕으로 행동과 예절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강인한 의지를 갖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사회에 정도를 구현한 조선의 선비였고 율곡 이이는 이런 조광조가 뒷사람에게 태산과 북두가 되었다고 말한다.5)

“배우는 이들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성리학이 높일 만하다는 것과 왕도(王道)는 귀하고 패도(覇道)는 천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 도에 끼친 공로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뒷사람이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와 같이 우러러보고, 또 조정에서 갈수록 융숭하게 은총을 내리는 것은 실로 당연하다.”-율곡 이이 『경연일기』 중에서

 

4) 김태완,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2.

5) 오항녕 역. 『율곡의 경연일기』, 너머북스, 2016.

주제발표2 | 정암 조광조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을 위한 소재 고찰 37

 

조광조는 유학의 정맥을 이어받아 독실하게 실천하고,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여 스스로 깊이 터득했다. 그의 몸가짐은 성현이 되기를 지향하고, 조정에 들어가서는 도를 행하려고 했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정성을 다했으며, 왕도를 펴고 의를 열고 이익을 추구하는 근원을 막고자 하였다. 이것이 조선의 선비들에게 성리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따르게 한 조광조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조선 도통의 계보

성리학의 특징 중 하나가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는 도학사상이다. 그래서 성리학을 ‘도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학(道學)이란 인간의 도리를 하나의 객관적 진리이자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참된 인격을 수양하여 사회에 바른 도리를 구현하려는 실천적 학문이었다. 성리학과 도학은 같은 말이지만, 성리학이 지(知)를 강조한다면 도학은 행(行)을 강조하였다. 도통(道通)은 “유학의 참 정신이 전해 내려온 큰 흐름”을 뜻한다. 도통은 학문이 전해 내려온 학통과 달리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 유학의 참 정신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제대로 구현했는지에 대한 절대 평가를 통해 나라 전체의 공론과 조정의 의견을 모아 도통의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조선에서 도통을 평가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했지만 크게 ‘절의’와 ‘명분’, ‘학문’과 ‘도덕’ 이었다. 학문적 위업이 있더라도 절의와 명분이 없다면 도통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6)조선의 도통은 여말선초의 정몽주와 길재로부터 시작된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금오산에 은거했던 길재는 살아남아 ‘절의’와 ‘도의’로 상징되는 그의 학문을 조선의 선비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1518년(중종 13) 경연에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7)

 

“김종직은 처음에 길재에게 배웠는데, 길재는 곧 정몽주의 문인입니다. 그러므로 김종직이 전한 학문은 진실로 그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조금이라도 선행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1518) 4월 28일

 

6) 오석원. 『유교와 한국유학』, 2014.

7) http://sillok.history.go.kr/

38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곡서원 활성화 방안

 

길재의 절의는 이후 사림파의 학통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림파가 ‘절의’라는 가치를 내세워 학문의 정체성을 도학(道學), 즉 인간된 도리의 학문으로 맞추면서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고려 시대까지 소급해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도통론을 정립하였다.8) 길재의 학문과 사상은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지는데, 사제관계로 연결된 이들은 조선의 대표적인 사화인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조선 도학의 계보를 이루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단순히 송대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계승하고 전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절의와 도의를 실천하다가 사화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전기 도학사상을 중심으로 발전한 조선 성리학의 학문 세계와 역사적 실천은 조선 중기 ‘도의’를 기준으로 심학과 예학이 발전하는데 기여하였다. 남겨진 문헌이 많지 않아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단서는 부족하지만 조선시대 유생들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 오랫동안 상소를 올린 것으로 보아 그들의 학문적 위업보다는 삶과 죽음에서 보여준 ‘도리’와 ‘절의’의 실천이 후대에 큰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이다. 경북 구미 금오서원의 길재와 김종직, 대구 도동서원의 김굉필, 경남 함양 남계서원의 정여창 그리고 용인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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