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靜庵) 서거 500년
작성자 최도철 기자 -등록 : 2019년 11월 3일 오후 5:19 / 수정 : 2019년 11월 3일 오후 5:1996
최도철 미디어국장 최도철 기자 docheol.
choi@jnilbo.com
최도철 미디어국장 최도철 기자 docheol.
choi@jnilbo.com
최인호 작가의 소설 ‘유림(儒林)’ 1권은 도학(道學)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으나, 훈구파에 밀려 사사(賜死)된 비운의 혁명가 조광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누구인가. 조정암은 17세 되던 해 평안도 어천역의 찰방(종6품)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갔다가 평생의 스승 환훤당 김굉필을 만난다.
중종 10년, 알성시에 급제한 조광조는 반정공신을 견제하려는 왕의 절대적 신임아래,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지금의 검찰총장 격인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기까지 초고속 승진을 한다.
성리학에 기초한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는 거침이 없었다. 현량과를 만들어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고, 팔도에 여씨향약을 두어 도덕사회를 이루고자 애썼다. 미신과 혹세의 온상, 소격서 혁파에도 나섰다.
조광조의 칼끝은 ‘살아있는 집단 권력’ 훈구파를 겨눴다. 연산군을 끌어내린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117명 가운데 무려 76명의 위훈을 삭제한다.
이에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궁녀를 시켜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 네 자를 써, 벌레가 파먹도록 한 뒤 ‘역모’라고 외쳤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주초는 조(趙)의 파자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조광조를 두고 한 말이다.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힌 조광조는 1519년 11월 18일 화순 능성현으로 유배돼 관노 문후종의 초가에 머문다.
자신의 괴로운 유배살이를 ‘활에 맞은 새’에 빗대 능성적중시( 綾城謫中詩)를 남긴 정암에게도 유일한 낙은 있었다.
조광조를 포함한 기묘명현을 위해 상소를 올리다 삭직되어 고향 능성으로 내려온 학포(學圃) 양팽손과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길지 않았다. 조정은 유배 25일만에 금부도사 유엄의 손에 사약을 들려 보낸 것이다.
정암은 절명시를 남긴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도다/ 맑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거짓없는 내 마음 훤히 비춰주리.’
학포는 장남 응기와 함께 시신을 거둬 섣달의 매서운 눈보라를 헤치고 60리 먼 길 쌍봉리 뒷산에 묘를 썼다.
정암 조광조 서거 500주년을 맞이해 화순군이 이번 주말 조광조 사상 계승 학술대회를 화순문화원에서 개최한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아래, 만산에 홍엽이 곱게 물든 가을날 단풍길 나서는 것도 분명한 ‘소확행’이겠지만 이번 주말은 조광조의 개혁적 목민사상을 경청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네이버 메인에#전남일보추가